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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맥락 · 1987년

한 사람의 죽음이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다

박종철 열사의 의로운 죽음이 어떻게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는지, 그 시대적 흐름을 정리합니다.

배경

군사독재의 폭압과 1987년

1987년의 6월 민주항쟁은 우리 사회 민주화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다. 우리는 지역과 남녀노소를 불문한 전 국민적 참여를 통해 만들어 낸 6월 민주항쟁을 통해 비로소 26년간 지속되어 온 군사독재정권을 끝장내고 대통령 직선제 도입을 포함한 우리 사회 「민주화」의 결정적 돌파구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박종철(당시 23세, 서울대 언어학과 84학번)의 의로운 죽음이었다.

사건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1987년 1월 14일의 이 사건은 당시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한 선배의 소재를 파악하려던 경찰이 박종철을 불법 연행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박종철은 사건이 터지기 며칠 전 위기에 처한 조직 재건을 추진 중이던 선배에게 몇몇 인물과의 연락업무를 부탁받은 상황이었다.

박종철은 「약속」과 「신의」를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겼다. 「약속」은 단순히 한 선배와의 사적인 약속이 아니었으며,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우리 사회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민족민주운동의 대의를 지켜내겠다는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종철 열사는 경찰의 물고문을 비롯한 모진 고문에도 선배의 소재를 밝히기를 거부했으며,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민주의 제단」에 바쳤던 것이다.

1·14 그날의 자세한 사실관계
6월 항쟁으로

활화산같이 폭발한 시민의 분노

박종철의 의로운 죽음은 온 국민의 분노를 자아냈고, 군사정권의 폭압에 숨죽이고 있던 민중들의 가슴 속에 숨기고 있던「민주주의를 반드시 쟁취하고야 말겠다는 열망과 의지」에 불을 지피게 된다.

여기에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박종철군 고문·치사·은폐·조작사건」의 진상에 대한 폭로는 급속도로 타 들어가는 도화선이 되어 마침내 6월 민주항쟁으로 폭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두려움에 떨던 전두환 군사정권은 기만적인 「6·29 선언」을 통해 위기를 회피해나가고자 한다. 이러한 전두환 군사정권의 시도는 민주세력의 분열과 맞물리면서 일단 성공하여 그해 12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전두환의 동료였던 노태우의 당선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6월 민주항쟁은 전두환 군사정권을 즉시 몰아내고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결정적 승리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 더 이상 폭압적인 군사정권이 지속될 수 없도록 하는「우리 사회 민주화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박종철 정신

대의·신의·민중지향

민주주의의 대의를 위해,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위해 「선배와의 약속」「신의」를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바로 이것이 「박종철 정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박종철은 비록 전두환 군사정권의 고문 앞에 쓰러져 갔지만, 온 국민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박종철의 의로운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는데, 부산의 평범한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박정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박정기는 이후 서울로 거처를 옮겨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에 적극 참여하면서 「박종철 정신」을 앞장서서 실천하였다. (박정기 아버님은 2018년, 향년 89세로 운명하여 마석 모란공원 막내 박종철 열사 곁에서 영원한 안식에 드셨다.)

친구와 지인들을 중심으로 해서는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를 매개로「박종철 인권상」 제정과 시상,「박종철 인권 장학사업」 등을 추진하면서 「박종철 정신」을 실천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