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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박정기 · 1928 — 2018

막내를 먼저 보낸 아버지
33년의 발자취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선생. 1987년 1월 14일 막내를 잃은 그날부터 2018년 영면에 들기까지, 박종철 정신을 가장 앞장서서 실천한 33년의 회고를 옮깁니다.

박정기 선생 약력

부산 공무원에서 민주화운동가로

  1. 1928. 10

    경남 동래군(현 부산 기장군) 정관면 월평리에서 출생.

  2. 1954

    부산시 수도국 공무원으로 입사. 이후 36년간 공무원으로 재직.

  3. 1956

    정차순 여사와 결혼. 슬하에 2남 1녀 — 박종부·박은숙·박종철.

  4. 1987. 1. 14

    막내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에서 고문으로 사망. 만 22세.

  5. 1987. 1. 16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 후 임진강 지류 샛강에 뼈를 뿌리며 — “철아, 잘 가그래이. 이 아부지는 할 말이 없데이.”

  6. 1988 ~ 1993

    유가협 부회장(1988~91)·회장(1991~93). 막내의 뜻을 이어 민주화운동에 헌신.

  7. 1988 ~ 1989

    의문사 유가족 진상규명 135일 농성에 참여.

  8. 1989. 3. 3

    박종철 초혼장. 장대비가 내리는 가운데 서울대 영결식 — 남영동 행렬은 경찰에 막힘. 밤에 마석 모란공원에서 하관.

  9. 1991. 7

    강경대 학생의 죽음 관련 전경 재판에 방청하다 법정소란죄로 영등포구치소 수감(징역 1년·집유 2년).

  10. 1992. 5

    불교인권상 수상.

  11. 1998 ~ 1999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 및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특별법 제정」 422일 농성에 참여. 1999.12.30 국회에서 두 특별법 통과.

  12. 2009. 6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해 국가와 검찰의 잘못 인정 — 유족에게 사과하라는 권고 결정.

  13. 2017. 1. 14

    박근혜 퇴진 촛불항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중 박종철 30주기 부산 촛불집회에 마지막으로 참여.

  14. 2018. 3. 20

    문무일 검찰총장이 요양 중인 선생을 직접 방문, 박종철 사건 수사에서 검찰의 잘못을 사과.

  15. 2018. 7. 28

    향년 89세로 운명. 7월 31일 민주시민장 엄수, 마석 모란공원 막내 박종철 곁에서 영원한 안식.

  16. 2020. 6. 10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거행된 6·10 민주항쟁 33주기 기념식에서 국민훈장 모란장 추서.

아버님의 일기

막내를 그리며 적은 글

1988. 2. 15

어머니의 한

우리 철아 어데 갔을까?

내가 철이를 낳아서 22년간 고이고이 키웠건만
엄마 어데 갔다 언제 온다는 말 한마디 없이
우리 철이 어데 갔을까?

15년간 애써서 공부시켰는데
엄마 버리고 누굴 따라 우리 철이 어데 갔을까?

그렇게도 존경하며 따르던 형님 누나 버리고
누굴 따라 우리 철이 어데 갔을까?

지가 원해서 가고 싶은 서울대학 들어가서
졸업도 못 하고 우리 철이 어데 갔을까?

너털웃음 웃으며 재미있게 놀던 친한 친구 버리고
누굴 따라 우리 철이 어데 갔을까?

* 어머니의 한 맺힌 기구한 구절. 미공개 글귀가 있어 그 글을 아버지가 옮겨 쓴 것이다.
1991. 2. 19

꿈에 본 막내

1987년 1월 14일 이후 가장 확실한 일이었다. 실현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쯤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항상 있던 차, 마침 이날 꿈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너무나 뚜렷했던 탓에 여기 기록해두고자 한다.

그렇게나 바라던 일이 일어났다. 어느 어스름한 곳에 들어가니 그 애가 누워 있는데, 눈을 어스름히 감고 있었다. 부석부석 자세를 바꾸어 옆으로 누우면서 눈을 뜨니, 그게 하도 반갑고 신기해서 밖으로 뛰어나가며 양손을 나팔처럼 모아 입에 붙이고 배에 힘을 가득 채워서는, “보소! 우리 종철이가 깨어났소! 살아났소!” 하고 고래고래 목이 터질 듯이 고함을 쳤다.

오랜만에 기다리던 막내를 본 것이 하도 신기하고 또 못내 아쉬웠다.
1996. 8. 6

박봉의 공무원, 막내를 잃다

누가 나더러 서울에서 살라고 했던가. 1987년 1월 어느 날 청천벽력같은 비보. 남들도 다 자식을 서울에서 공부시킨다는 말에 우리 부부도 그렇게 하고자 하는 집념으로, 박봉의 공무원 생활에 허리띠를 졸라매며 살았다. 터울 적은 3남매를 계속 뒷바라지하다 보니 힘든 생활은 말해 무엇이겠냐마는 남들이야 이해하기 어려웠을 테다.

87년 1월 어느 날 서울대 4학년이던 막내가 운동을 하다 시위 주동, 연행, 구류, 급기야는 구속되어 옥고를 치른 후 5공 신군부정권의 사람 잡는 남영동 대공분실 밀실에서 그토록 사랑하던 형제와 곧 형수가 될 이에게 사랑받던 일도 끝난 채, 어머니 아버지 곁을 떠나고 말았다.

민주화운동의 의지와 민족적 양심을 버릴 수 없다고, 끝내 맞서다 죽을 순 있어도 굴복할 순 없다는 운동의 푯말을, 21세 젊음의 죽음으로 남긴 채. 우리 집에서는 희망하는 것들이 많았는데… 우리 가족은 그저 망연자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2000. 1. 4

막내의 시계를 고치고

찬훈(사업회 사무국장)이 1월 1일 인사차 왔습니다. 우리 가족의 사진, 종철이 누나와 조카 사진을 비롯해 종철의 유품, 유고 등을 알리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고 막내의 기타를 보니 기타 줄이 없어진 채였습니다. 막내의 시계는 멈춰 있었습니다.

수리가 가능하다면 시계를 고쳐봐야겠다고 생각해 동대문 시계점에 맡겼습니다. 건전지를 새로 넣고, 약간 손을 보니 잘 움직였습니다. 단돈 3천 원으로 고친 시계를 보니 틀림없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아! 간다! 시계가 틀림없이 간다! 그만 가슴이 뭉클하고 말았습니다. 이럴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나 막내만은 확실히, 돌아올 수 없는 죽음으로 남아 버렸습니다.
2001. 1 · 남영동 위령제

박종철 14주기를 앞두고

2001년 1월 8일 일기 — 막내 14주기가 다가왔다. 가족이 막내가 죽어간 현장에서 종철의 넋을 기리기 위해 당국에 민원을 냈다. 역사의 현장을 감추면서 무슨 교육을 하겠다는 말인가. 이런 작태를 바로잡을 수 있을 때만 민주사회가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남영동 — 막내가 끝내 입을 다물고 그들에게 목숨을 잃어가면서까지 독재 무리에 굴하지 않았던 곳. 이미 15년 전 막내가 숨져 간 그 자리에 가족 단위로나마 방문하게 된 것은, 막내의 한이 서린 그때 그곳을 확인해보고 역사적으로 고찰하기 위함이었다.

1월 12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가족과 스님이 509호실에서 막내의 혼을 달랠 시간이 허용되었다. 범진 스님·백우 스님·취재 기자와 카메라 등 20여 명이 들어갔다. 김동완 목사님은 꽃바구니를 전했다. 염불 소리에 끝내 힘들게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까지가 여간 곤욕스러운 게 아니었다.

※ 위 일기 발췌는 사업회 보관 「박종철 14주기를 앞두고 (2001. 1)」 글에서 정리한 것입니다.

아버님이 남기신 일기·기고문·추모사는 사업회가 보관 중이며 점진 공개됩니다. 후속에서 「민주화운동가 박정기」·「추모사 모음」·「아버님 기고문」 등의 콘텐츠가 별도 페이지로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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